|
오피니언칼럼 |
<칼럼> 환경운동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장인진 |
|
환경운동은 누구를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닌가?
자연을 지키고 보호하는 환경운동은 바로 생명운동이고 건강을 지키고 올바른 인성을 만들어 갈 수가 있다는 이 자연의 섭리를 깊이 생각해야 된다.
지금 우리의 주위에는 병들고 썩어 가는 자연이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어느 특정인이 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명절 때가 되면 고속도로 주위에 버려진 쓰레기 속에서 인간들의 허욕과 탐욕의 찌꺼기들을 보게 된다. 양심을 속이고, 버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인간양심의 교활한 이중성을 생각하게 된다.
어느 수도원 수도사의 이야기처럼 자기의 양심을 끝까지 속일 수 있을까?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속인 것은 쉽게 잊혀지고 묻어 버릴 수는 있지만 자기 양심을 속인 것은 평생을 두고 되살아난다는 사실이다. 어디를 가든 자기의 양심이 자기를 항상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운동은 말보다는 관심과 실천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환경에 대한 식견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 소각장을 반대하고 일조권을 따지고 소음기준을 알고, 권리를 주장 할 줄도 알고 있다. 그러나 소각장을 반대하면서도 다이옥신을 줄일 수 있는, 쓰레기 분리배출은 왜 할 줄 모르는가, 덜 쓰고 덜 먹고 덜 버리는 운동에는 왜 소극적일까. 우리는 너무 쉽게 쓰든 물건들을 버리고 새것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새로 지은 지 20년이 안된 집을 헐어내고 다시 짓 는 나라는 아마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이다. 먹을 수 있는 음식물을 버리는 것은 천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던 우리민족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우리는 쓰레기로 버려지는 음식물이 돈으로 환산하면 년 간 15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열마디 구호나 식견보다는 한번의 관심과 실천이 진정한 환경생활이고 자녀에 대한 훌륭한 환경교육이 될 것이다.
환경용량과 엘리베이터의 기능, 우리는 매일 아침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엘리베이터에도 사람이 탈수 있는 용량이 있듯이 자연환경에도 환경용량이라는 것이 있다. 탑승인원에 한사람만 더 타도 엘리베이터가 안 움직이는 것과 같이. 지금 자연환경은 인간들의 욕심과 탐욕 그리고 오염행위에 대해 참고 인내하면서 기다려 주지만 주어진 환경용량이 넘어서는 그 어느 날 자연은 우리에게 그 울분과 분노를 어떻게 표출 할 것인지 두렵기만 하다.
남극의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태평양 상에 섬나라 투발루공화국 국민 모두가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야 되는 지구상의 비극이 진행되고 있으니 말이다. 중국대륙에 사막화 현상이 진행되고 브라질 아마존의 숲이 파괴되고 있다고 한다. 지하수자원이 오염과 남용으로 고갈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돈을 주고도 물을 얻을 수 없는 날이 우리 앞에 성큼 다가서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칠래 앞 바다에 떠 있는 이스터 섬, 태평양을 바라보고 늘어서 있는 50여 톤이 넘는 석상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이스터 섬에서 멸망한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행동이 세계 도처에서 행해지고 있는데 대해 비웃을 것이다.
인간들의 끝없는 욕심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명의 이기들이 인간의 욕심과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남용될 때 과연 이 지구상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과학은 직선이고 환경은 곡선이라 한다. 곡선은 느리고 돌아가지만 사색과 생각할 수 있는 여유와 기다림이 있다 그리고 때로는 직선보다 더 빠를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 저작권자 © 환경법률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