盡日尋春不見春 종일 봄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杖藜踏破幾重雲 지팡이에 험한 길을 헤매 다니다
歸來詩把梅硝看 돌아와 매화나무 가지 끝을 보니
春在枝頭已十分 봄이 이미 가지 끝에 완연하구나
송나라 시대 대익은 탐춘 [探春]을 통해 봄을 이렇게 노래했다. 봄을 찾기 위해 저 머나먼 길을 헤매 다녔지만 지쳐 돌아올 뿐 봄을 찾지 못했다. 이에 낙담한 시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눈 앞 에 있는 매화나무 가지 끝에 핀 매화 꽃송이였다. 봄을 찾으러 헤매다녔지만 결국 봄은 시인의 눈 앞 에 만연하게 피어 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를 하나 기억해보자. 크리스마스 전날 밤, 나무꾼의 두 어린 남매가 꾼 꿈에 대한 이야기로 말이다. 이 남매의 꿈에는 요술쟁이 할머니가 나타나서 파랑새를 찾아 달라고 말한다. 그래서 두 남매는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멀리 여행의 길을 떠난다. 죽음의 나라를 두루 살피고, 또 과거의 나라를 빙 돌아다니고, 두루두루 편력을 한다. 그러나 아무 데서도 행복의 파랑새를 찾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결국 알다시피 결국 이 남매는 파랑새를 찾는다. 바로 자기 집에 돌아와서야 집 문에 매달린 새장 안에서 말이다. 이 간단한 이야기는 벨기에 태생의 프랑스 작가 마테를링크의 동화극이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교훈으로 파랑새 동화는 러시아의 위대한 연출가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출로 1908년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어 큰 호평을 얻은 것은 물론, 1911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애드가 앨런 포우는 등잔 밑이 어두운 사람들의 성향을 본능처럼 활용해 단편소설 “도둑맞은 편지”를 쓴 게 아닐까 싶다. 모두가 찾고 있던 편지가 결국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무실 편지함에 꽃혀 있는 내용을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우리는 이런 글들을 보면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고 참 어리석다 하면서 웃지만 실은 그런 우리를 보고 쓴 내용들이란 점이다. 오늘날 사회에서도 이런 경우는 종종 볼 수 있다. 개발을 향해 보다 멋진 삶을 꿈꾸던 인류는 중국의 사막화로 인해 봄마다 황사를 피하기 위해 멋진 옷에 어울리지 않는 마스크를 써야 한다. 게다가 나무를 뽑아댈 때는 언제고 이제는 중국도 부족해 지방 곳곳마다 나무심기에 혈안을 올리고 있다. 진정한 행복을 알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인 것은 최근 늘어나는 끔찍한 사건 사고 소식에서도 알 수 있다. 자녀와 행복한 삶을 꿈꾸던 어머니는 목적과 수단이 바뀌어버려 생활고를 비관한 나머지 자신의 손으로 자녀들을 죽였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어디에 속하고 있는지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봄을 찾으러 머나먼 길을 떠나 헤매고 있는 시인의 모습은 아닌지 말이다. 파랑새가 바로 집 안에 있건만 그 새를 찾으러 빙빙 돌아다니고 있는 남매의 모습은 아닌가, 만약 간절히 찾고 있다면 내 사무실 편지함부터라도 찾아봤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3월이 시작됐지만 상황은 여전히 어둡다. 사회 전반에 걸쳐 기쁜 소식보다는 낙담케 하는 뉴스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헤매지는 말자, 이럴수록 더 힘을 아끼고 지혜로워져야 할 때다. 봄이 바로 내 앞에, 파랑새는 바로 우리 집에, 편지는 도둑 맞은 게 아니라 바로 내 편지함에 있을 뿐일 수도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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